Sunday, May 18, 2014

다시 찾은 고린도

다시 찾은 고린도


여행 3일째, 델피에서 이 글을 쓴다.

어제는 몸이 천근이 되어 일어났는데, 오늘 아침은 한결 몸이 가볍다. 어제는 좀 강행군을 했는데도... 아침 8시에 아데네를 출발했는데, 이 곳 델피 호텔에 들어왔을 때는 밤 9시 반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운 것이 거의 12시였는데, 아침 7시가 되니 저절로 일어나진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떠날 때 마음이 좀 무거웠는데, 오늘은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어제는 고린도를 비롯해 펠로포네수스 (Peloponese)반도의 여러 곳을 방문하였다. 한 가지 볼거리는 남쪽의 사롱가(Saronga)만과 북쪽의 고린도만을 연결하는 고린도 운하였다. 이 두 바다 사이를 6km정도의 육지가 막고 있는데, 수에즈 운하와 같은 운하를 만들어 뱃길을 튼 것이다. 19세기 말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폭이 좁아 큰 배들은 다니지 못해도, 웬만한 배들은 이 운하를 통과하며 엄청난 거리를 절약하는 것이다. 운하 입구에 가 보니, 디올코스라는 길이 있는데, 이 길에 얽힌 사연이 기가 막힌다. 고대로부터 이 두 바다를 연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디올코스(Diolcus)이다. 이 이름의 뜻은 "내가 끈다 (I pull)"인데, 운하가 생기기전 두 만 사이에 길을 만들어 그 위에 배를 끌어 다른 바다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뱃길을 단축해 얻는 수입이 고린도시의 풍요한 재정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고하는데, 육지로 배를 끌어 옮기는 일을 도대체 누가 한 것인가? 그런데 이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들은 유대출신 노예들이었다고 한다. 모두 6,000명의 노예들이 동원되었단다.

서구문명의 발상지인 이 곳을 돌아보며 느끼는 것은 인간역사의 잔인함이다. 수없는 전쟁과, 승리자와 패배자의 운명의 극명한 갈림 속에서 역사는 승리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아닌가? 오는 도중 비행기안에서 "12년간의 노예생활" (12 Years Slave)을 볼 수 있었는데, 우아하고 풍요한 남부 백인들의 생활의 뒤안길에서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야했던 흑인 노예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을 그린 영화였다. 그리고 보니, 서구의 번영 뒤에는 노예들의 희생이 있었고, 고린도의 번영 뒤에도 유대인 노예들을 비롯한 전쟁노예들의 비참한 삶이 있었다는 것을 이 운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기억하게 된다. 15세기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의 여러 나라들은 식민지를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 두고 그 착취를 통해 부를 이룬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왜 또 고린도에서까지 나는 것인지!

6년만에 다시 찾은 고린도 유적! 물론 유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가이드 Voula와 인솔자인 Rasmussen 박사의 강의와 안내로 바울이 찾았던 고린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몇 가지 알지 못했던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아폴로 신전의 위치와 발굴된 시장유적의 위치는 100미터도 안 떨어진 지척이다. 신전에서 제물로 드리는 소나 양, 염소의 고기를 드리고 남으면 시장으로 내다 팔았다고 한다. 값이 저렴하니, 고린도 시민들이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규정에 까다로운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이거나,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젔던 제물을 먹는 것이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이 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와서 보니, 그 문제가 고린도 교회 일상에 늘 일어나는 일이었을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된다.

이 곳에는 아폴로 신전 외에도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 1,000명이 있었다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신으로써 이 신을 섬기는 여사제들은 자기의 몸을 아프로디테의 작은 분신으로 여겨서, 성적 행위를 신전봉사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세계의 4대 도시 중의 하나이어서 15만명의 인구를 가졌다는데, 도시의 번영은 성적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 가지 여사제들에게 특이한 점은 신전 봉사를 위해 자원하거나, 차출되면서  다 머리를 깎았다는 것이다. 머리를 깎는 행위는 헌신과 복종(submission)을 상징했다고 한다. 이 여자들 중,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의 머리 깎은 모습이 차별과 천대를  교회 안에 가져오게 된 것이다.  교회안에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한다는 사도 바울의 지침은, 이와 같은 개종자들이 천대받고 차별받는 것을 막고자하는 의도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이다.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도 교회에 문제가 되었다. 안내자가 유적지 한 가운데 놓인 비석을 가르키며, 거기에 써 있는 이름을 읽어보라고 한다. "에라스도"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안내자가 문장 전체를 해석한 내용은 "재무 에라스도가 자기 돈으로 여기 도로를 포장하였다." 고린도시의 회계였던 에라스도의 치적을 기록한 말하자면 송덕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에라스도는 바울서신에 3번 등장하는 그 에라스도라는 것이다. 옛날 희랍의 도시에서 시장이나 시의 재무, 혹은 높은 지위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연령이나 재산정도에 어느 정도 자격기준이 있어서 자기 재산을 들여서 시민들을 위해 봉사할 만한 인격과 재력을 갖추어야했다는 것이다. 교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와 같은 정부의 관리나 재산가들이 있었는가 하면, 노예들이나, 사회적 신분이 낮은 시민들도 있었고 암암리에 이들 사이에는 장벽이 있었고 차별이 있었던 것이다. 주의 만찬으로 불리운 애찬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이와 같은 차별이 나타난 것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 전에 왔을 때는 바울과 거의 상관없는 유적 구경에 지나지 못하였는데, 이 번 여행은 안내자의 설명을 통해 바울 당시의 형편과 그의 편지의 배경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보람을 느꼈다.

안내자가 문득 발치에 있는 야생화를 가르키며, 이 꽃이 무슨 꽃인지를 아느냐고 묻는다. 일행 중에 한 여자분이 캐모밀(Camomyl)이라고 대답한다. 안내자는 잘 맞추었다고 칭찬하면서 이 식물에 얽힌 속담이 있다면서  소개하는 것이 이렇다. "캐모밀처럼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아름답고 유용하면서도 낮은 자리에 있으니."  캐모밀이 우리가 즐겨 마시는 차의 원료가 되는 것은 알았지만, 이러게 존경받는 식물일 줄이야.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High City)

고대 고린도시 재판정의 연단: 아마도 바울사도가 고린도 총독 갈리오 앞에서 재판을 받던 곳

고린도 박물관에 진열된 석상들: 이 석상은 몸통들만 있는데, 머리가 잘려나간 것이 아니라, 미리 몸통을 만들어 놓고,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석상의 주인이 될 사람의 머리를 따로 제작하여 알맞는 몸통위에 얹어서 완성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 있는 것들은 미처 팔리지 않은 재고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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