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9, 2014

버가모, 두아디라, 필라델피아

버가모, 두아디라, 필라델피아


이 번 여행의 주제는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이지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 교회가 있던 도시들도 여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같이 일생에 한 번이나 이런 여행을 할 수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다. 이 번 여행에서 알게 된 것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교회들은 에베소를 시작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차례를 따라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에게해에 면한 에베소, 서머나 다음에, 내륙으로 들어가서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그리고 라오디게아이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기억하기 쉽도록 이렇게 한 방향을 정해 도시들을  짚어 간 것이  내 경험에서 이해가 된다. 나도 내가 지나온 교회들을 기도할 때, 정해 놓은 순서를 따라 기도한다.  어떤 방향이 없이 기도하다보면, 놓치는 교회가 있기때문이다.

이제 기술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방문한 순서를 따른 것이다.

버가모


버가모는 성경에는 요한계시록에만 언급되고 있지만, 도시의 규모나 로마 제국에서의 위치로 보아 중요한 도시이다. 우리가 본 도시 중에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유적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이 도시에 대해 특기할 사항은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이 소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 도시에는 황제를 위한 신전이 두 군데나 있었다. 아우구스도와 트라얀을 위한 신전이다. 요한의편지 속에서 버가모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 사단은 바로 자신을 신격화한 로마황제를 가르키는 말이 된다.  황제를 섬기는 신전은 로마가 점령한 지역의 주민을 쇠뇌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트라얀 황제를 "바다와 땅의 주(kurios)"라고표현함으로써, 점령자는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것과 점령이 신의 뜻이라는 인식을 점령지 백성에게 주입시킨 것이다.  이런 일을 아마도 통치자들의 본거지인 로마시에서도 할 수 있었을까, 의심된다. 로마사람들에게는 황제가 세워지는 과정에, 신적 요소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적에 의해 황제가 암살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 황제로 세워지기도 하며, 무엇보다 원로원의 찬성을 받아야하는 황제의 자리를 신격화한다는 사실을 로마시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화가 끼일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점령지에서는 황제가 신으로 둔갑하였다. 참... 역사의 희극적인 면이 아닌가?

황제의 이름들을 비롯해서 모든 숭배대상은 흰 대리석에 새겨져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버가모교회의 교인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사람에게는 흰돌을 주고 그 위에 이름을 새겨주겠다고 한 것이다. 황제보다도 더 크고 영원한 영광을 얻게된다는 약속이다. 사실 당시의 크리스챤들, 특히 버가모와 같은 황제숭배가 성한 곳에서 살았던 크리스챤들에게는 박해가 특히 심했고 순교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요한의 편지에 '안디바'라는 순교자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그 한 예다. 그 박해는 도미시안 황제 때 극심했고,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챤 박해를 중지시키기 바로 전인 311년까지도 이 지역에는 박해가 심했다고 한다. 이런 형편에서 요한의 편지 속에 나오는 환상이 주는 예언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를 짐  작할 수 있다.

아티나 신전을 비롯해서 아폴로 신전, 그외에 황제를 모시는 신전이 있는 곳에서 초대기독교회의 박해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고 무거워지기까지 했는데, 그 다음 방문한 곳은 신전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른 곳이었다. 우리가 돌아보는 유적 중 유일한 병원의 유적이다. 물론 근대 개념의 병원과는 매우 다른 곳이지만, 수술실도 있고 회복실도 있고 물리치료실도 있는 곳이다. 특히 심리적인 치료도 중요하게 여겨서, 병원 부근에 펼쳐지는 풍경은 아주 평화로운 구릉지대이다. 완만한 언덕에 퍼피꽃이 만발한 풍경이 보기만해도 즐거워진다.  물이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는 이론에서 스파를 만들었다는 설명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믿음치료법이 관심을 끌었는데, 치료가 다 끝난 후에 "내가 고침을 받았다"고 환자에게 외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고침을 받았다는 확신이 치유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생각은 어제, 오늘에 생긴 이론이 아닌 것이다.

 특히 뱀이 치료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실제로 환자의 치료에 뱀을 이용한 기록이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뱀을 통해 치유된 사람이 많은 돈을 병원에 희사했다는 것이다. 신전 한 구석에 뱀을 조각해놓은 비석이 서있는 것을 보아 뱀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병원은 현대의 말로 병원이지 사실은 치유의 신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모시는 신의 이름은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인데,  치유의 신인 희랍신의 하나이다. 이 신의 이름을 따서 병원의이름을 아스클레온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병원의 명성과, 또 가장 유명한 의사인 2세기의 갈렌(Galen)의 존재때문에, 버가모 거리는 각 지에서 모여든 환자와 그 가족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면서, 아하 그래서 병원을 상징하는 엠블렘에 뱀이 들어간 것이로구나, 또 하나 배웠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시설의 병원과 의사들이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치료에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일과, 사탄의 상징인 뱀과 같은 존재를 섬기는 일이 동원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시대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생각이 되면서, 또 한 편으로는 그렇게 지켜낸 믿음은 얼마나 순수하며 강한 것인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두아디라 (Thyatira)


버가모의 화려하고 광대한 유적을 보고 두아디라에 가보니, 남아 있는 유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이 곳이 빌립보 교회의 주역이었던 자주장사 루디아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그 연관에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이방인 루디아가 빌립보 성밖에 강가에서 안식일에 기도하려 나갔을까? 그 해답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을 우리는 안내의 설명을 통해 듣게 되었다. 일찌기 이 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이방인들 중, 할례를 받거나 유대혈통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유대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God fearer)라고 불렀다는데, 루디아의 집안이 이런 집안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 확실한 연관은 어찌 알겠는가? 그럴듯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우리가 찾은 필라델피아의 유적은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의 잔해였다. 시내 한 가운데 어마어마하게 큰 벽돌기둥 네개가 서있었을 뿐 별다른 유적이 없었다. 이 도시는 동서를 관통하는 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인근에 버가모와 사데 같은 큰 도시들에 가리워져 크게 번성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황제를 섬기는 황제숭배의 신전은 다른 곳보다는 훨씬 늦은  3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세워졌다고 한다.

유대인의 회당이 소아시아 지역에 있은 사연도 흥미로웠다. 이 곳을 브리기아 지역이라고 하는데, 루디아 왕국이 오래동안 통치한 곳이다.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옛 왕국의 회복을 꾀하는 반란군들의 반항이 심했다고 한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로마의 황제와 이 지역의 총독이 한 전략을 낸 것이, 유대인 이주이다. 바빌론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 2,000가구를 이 곳에 이주시킨 것이다. 그 것은 유대인들이 비교적 법을 잘 지키고, 협조를 잘 하여, 사납게 날뛰는 폭도와 같은 이 곳 주민들에게 모범을 삼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대신, 유대인들에게는 땅도 주고, 10년간 세금도 면제해주고, 시민으로써의 권리행사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아시아 지역에 유대교 회당들이 많이 서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하면서,  가능하면 유대교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게 된 사연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유대교회당이 있었던 이유로 이 곳의 교회는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대항하여 싸워야했다는 사실을 요한의 편지는 암시하고 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이 도시는 기독교 신앙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도시의 환경이 이 곳에 살던 크리스챤들에게는 좋게 작용한 것일까? 요한의 편지에서 필라델피아교회는 책망받은 일은 없고, 칭찬 뿐이다.

잡소리 


너무 많이 걸으니 발과 다리가 아프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기침은 좀 잦아들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이 여행을 끝까지 마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는데, 그런 염려는 이제 사라졌다. 과연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경험을 또 다시 하는 것이다.

네델란드 헤이그의 이준기념교회에서 다음 주일에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여행 떠나기 직전에 받았었는데, 어제 이메일이 와서 설교 원고를 보내달라고 한다. 참 그 담임 목사님(최영묵목사)도 인정사정 보아주질 않는다. 여행 중에 어떻게 설교 원고를 작성해서 보내나? 오늘도 잠자기는 글렀다. 설교원고를 작성을 해아하니....

이 글은 지중해 연안 터키 남쪽의 항구도시 안탈리아(Antalya)에서 쓴다. 바울이 드나들던 앗달리아 항구가 바로 이 도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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