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2, 2014

에베소



에베소(Ephesus)


에베소는 주후 1세기경, 당시 로마제국 전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디옥, 그리고 다음으로 에베소였다. 인구는 25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지중해서부터 시리아를 연결하는 도로의 서쪽 끝이어서, 아시아에 드나드는 물류의 기지역할을 했다. 도시는 부유해서, 지금도 그 부의 흔적이 유적에서 풍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토록 번성했던 도시도, 항구가 흙에 묻히면서 주후 13세기경 완전히 항구의 역할을 잃게 되었고 그 후로 도시는 급락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터키에는 에게해로 흘러들어가는 큰 강이 4개가 있는데, 강마다  바다쪽으로 흙과 모래가 쓸려내려가 쌓이는 현상 때문에 과거에 바뻤던 항구가 없어지는 희한한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에베소도 과거의 번성했던 항구가 지금은 늪지대가 되어 있고, 도시는 조그마한 마을이 되어 쎌츄크(Selcuk)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다.


에베소는 터키의 고대 유적 중, 가장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 시대에만 해도, 모두 12 곳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신은 아데미(Artemis)신으로써, 에베소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별명을 아데미의 신전지기(Neokoros)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매년 봄철이 되면 아데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각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 났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스스로 뉘우치고 예수를 영접하며, 마술에 관한 서적을 모두 불태우는 일이있었다. 이런 효과적인 복음의 선포가 아데미 우상 장사들의 생계를 위협하게 되면서 그들의 사주를 받아 폭도로 변한 시민들의 소요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런 축제의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에베소는 기독교 초기 역사와 매우 관련이 깊은 도시이다. 사도 바울이 이 곳에서 2년 반 내지는 3년간 머물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운 이야기를 비롯해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아볼로, 디모데, 사도 요한등의 이름이 에베소와 관련이 있다. 크리스챤들에게 에베소방문은 마음이 설레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에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했다. 비교적 일찍 도착했으나, 우리 보다 더 일찍 도착한 관광객들로 인해,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다. 이제까지 본 유적지 어느 곳보다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아데네의 아크로폴리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복잡한 거리에서 바울의 숨결을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발굴팀이 100년 넘게 수고한 덕분에 고대의 건물 모습이 많이 복원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선 눈길을 끄는 곳은 쎌수스(Celsus) 도서관이다. 2세기에 건축된 이 도서관은 이 곳의 총독이었던 아퀼라가 자기의 아버지의 무덤위에 아버지 쎌수스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2세기에 지어져서 바울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은 건물이다.

또 하나 주목할 유적은 극장이었다. 바울을 고소한 은세공업자 데메드리오가 동업자들과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킨 바로 그 곳이다.

 반 원형 오케스트라석과 무대 시설이 있는곳에서 소리를 질러보니, 그 넓은 객석에까지 소리가 들리도록 음향설계가 뛰어난 극장이었다. 고대 음악에서는 주로 어떤 악기가 연주되었는가 물어보니, 오늘과 비슷한,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들이 당시에도 있었다고 안내자는 대답한다. 어디선가 근사한 남성중창이 들려온다. 돌아보니, 흑인 남성 6명이 반원을 만들어 서서 흑인영가를 부르고 있다. 너무 훌륭한 연주였다. 어디서 왔느냐, 무슨 중창단이냐 물으니, 이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온 세미프로 중창단인데, 이곳에 들린 김에 한 곡조 뽑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졸라 한 곡 더 불러달라고 강청을 한끝에 드디어 앙콜송을 들을 수 있었다. 모처럼 재미있는 순간이었다.

극장의 크기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중의하나로써,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극장은 또한 시민회의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어, 바울일행을 고소한 일에 대해 시민들의 격론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극장의 한 가운데서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본다. 아데미를 섬기는 시민들의 노한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이런 함성을 들으면서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졌을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성에도 바울을 도와주는 관리들이 있어서, 그가 극장에 들어가 해명하려는 것을 만류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의 3년 가까운 체류동안에, 믿는 사람도 생기고 친구도 생겼으리라.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3개월을 복음을 전한 후, 반발이 심하자 두란노에 있는 서원에서 두 해 동안을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유적 중에서 두란노를 찾아 볼수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발길을 옮겨 사도요한 기념교회를 찾았다. 사도 요한은, 전설에 의하면, 밧모섬의 유배에서 돌아온 후 20년 간을 이 곳에 머물며 에베소교회를 돌보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위에서 부탁한 유언을 받들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죽을 때까지 섬겼다는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으신 후 얼마 안되어, 즉 주후 42년 졍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이 곳에 도착했다고 하는 데, 그러면, 바울보다 먼저 요한이 이 곳에 왔다는 것인가? 이 곳에서는 사도 바울보다도 사도 요한의 존재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바울기념교회는 없어도, 요한기념교회는 있으니까. 사도요한 교회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건물이었다.  6세기에 저스티니안 황제와 그의 부인이 돔이 6개나 있는 큰 교회를 요한의 무덤이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 세운 것이란다. 물론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으나,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후에 터키인들은 무너진 교회 바로 옆에 회교사원을 세웠다. 교회를 돌아보는 중에 미나렡에서는 기도시간을 알리는 챈트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마리아가 살았다고 추정되는 장소가 있어서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곳을 성지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몇년전에는 교황(베네딬트 16세)이 이 곳을 방문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요한교회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데미 신전의 폐허가 보인다. 아데미는 에베소의 수호신으로써, 앞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이 신전은 에베소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이 신전의 규모나 화려함이 얼마나 요란했던지 고대의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였다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 있고 기둥 하나가 달랑 남아 있었다. 그 기둥 꼭대기에 황새 부부가 새끼를 낳고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에베소를 방문하는 모든 크리스챤들이 한 가지 공통적으로 가지는 의문이 있다면, 이렇게 화려하고 위대했던 기독교는 왜 그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일까 하는 것이다. 단지 건물만 폐허가 된 것이 아니다. 교회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4세기 중반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황제들은 자기들의 이름으로 기념교회를 짓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니, 높은 지위의 관리가 되거나, 사회에서 인정받고 출세하는 일을 위해서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던 교회가 어떻게 이 지역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군사적 요인도 있었을 것이고, 회교의 막강한 세력과 그들의 무자비한 종교정책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지만,  기독교회의 이 지역에서의 몰락은 운명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안에서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교회,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소외됨이 없는 교회, 신앙생활이 교양과 덕의 한 모양이 되어 버린 교회는, 이슬람 침공이나, 십자군 전쟁과 같은 모진 바람을 이겨낼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것이 오늘 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에서의 교회의모습이 아닌가? 이런 인간 본성을 이겨 낼 수 있는 저항력이 우리 믿음에 있는가? 이 것을 에베소에서 묻게 된다.  

에베소 방문은 오후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발과 다리가 아프다고 야단을 했지만, 그래도끝까지 따라다니며, 하루의 순례를 마친다. 다음 행선지는 파뭌칼레(Pamukkale)로써, 터키의 유명한 온천 휴양지이다. 이 곳에는 지열로 덥혀진 온천수로써 유명한데, 철분과 칼슘이 탄소와 섞여있어, 피부치료의 효과가 있다고한다. 사진에 보는 묘한 색갈의 기둥이 호텔 정원 한 가운데 서 있었다. 파묵칼레는 목화성 (Cotton Castle) 이라는 뜻을 가진다고 한다.


파뭌칼레로 이동하는 중에 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상한 풍경이 나타난다. 지붕에 병이 하나, 둘 올려져 있는 것이다. 안내가 설명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 집안에 있는 딸 중에 결혼할 나이가 된 처녀가 있으면, 병을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이 병을 보고 결혼하려는 남자가 찾아오면, 처녀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몰래 남자를 훔쳐보다가 남자가 맘에 들면 달콤한 차를, 마음에 안 들면 쓴 차를 내어놓았다는 것이다. 터키 전역에서 보는 풍습은 아니며, 우리가 지나는 이 지방에 국한된 풍습이라고 안내자는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나라의 자존심이 혹시 훼손되는 풍습이 아닐까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몇 년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사막에 사는 베두인의 천막  위에 흰 색갈 깃발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것도 혼기의 딸이 있다는 신호였다. 나도 아직 시집 안간 딸이 있는데, 어떤 수단으로든  신랑후보들을 유인할 수 있는 계책을 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급해진다.

잡소리


그리스와 호텔의 음식은 정말 끝내준다. 특히 터키의 호텔부페는 화려하기가 비할 데 없다. 특히 디저트 섹션은 다양하고, 달콤하기가 그만이다. 맛으로도 화려하지만, 보기로도 화려하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부페도, 며칠 지나니, 그저 그렇다. 처음에는 눈이 놀라고, 다음에는 입이 놀라지만, 며칠이 지나면 별로 놀라는 일이 없다. 다 거기서 거기다. 내가 터키에서 제일 맛 있게 먹은 음식을 치라면, 어느 날 점심에 길가 노천식당에서 먹은 피데라는 음식이다. 중동식 빵에다 고기가 섞인 소스를 넣고 바른 정말 수수한 음식이다. 아내는 터키에서 먹는 음식 중 가장 맛 있는 것이 꿀을 섞은 요구르트라고 한다. 모두 값으로 치면 터키돈으로 10리라 (5불)정도면 사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화려한 것은 역시 생명이 길지  못하다.


Friday, May 30, 2014

밧모섬, 멜리데

밧모(Patmos)섬, 밀레도(Miletus)


 밧모섬


과거에 터키를 여행한 사람들로부터, 밧모섬에 가려고 했다가 바다가 너무 험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혹시 그렇게 실망스런 일을 만나는 것이 아닌가, 마음조리며 기다렸었다. 그러나 일어나보니, 날씨는 화창하고 바다는 잠잠하였다. 새벽 다섯시 부터 서두르며 준비해서  쿠사다시(Kusadasi)항에 도착하니, 밧모섬에 가는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 36명을 위해 특별히 전세낸 배다. 밧모섬은 터키에 가깝지만, 그리스 영토이다. 그래서 배에는 뒷편에는 터키국기를 앞편에는 그리스 국기를 달고 있었다. 출경의 수속을 끝내고 나니 6:30분, 배는 고동을 울리며 에게(Aegae)해의물살을 가르며 동쪽을 향해 나아간다. 옛날 사도 요한은 죄수의 신분으로 처량하게 떠난 길을 우리는 소풍가는 학생들처럼, 흥분에 들떠 가고 있는 것이 죄송하기는 했다. 그러나 즐거운 것을 어쩌랴? 배안에 떠드는 소리,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4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밧모섬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이 요한이 환상 속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동굴이었다. 정말 이 동굴이 그 동굴인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러 동굴 중에 가장 그럴듯한 동굴을 골라서 성지로 삼았을 것이어서, 동굴의 깊이나 크기가 꽤 그럴듯 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밧모섬은 로마제국의 식민도시인 밀레도의 관할하에 있었다고 한다. 요한은 그러므로 밀레도에서부터 밧모섬으로 이송되었을 것이다. 요한이 쓴 편지가 어떻게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전해졌을까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요한의 조카인 프로코루스(Prochorus)가 삼촌인 요한의 수발을 들면서, 편지를 전하는 일까지 했다는 것이다. 요한이 머물렀다는 동굴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의 해안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요한 당시에는 그 곳이 육지와 멀리 떨어진 외진 섬이어서, 로마제국이 귀찮게 여기거나, 죄를 지은 자들을 유배시키는 저주받은 땅이었으나, 지금은 너무나 아름다운 휴양지였다. 이름을 알만한 유명한 배우들이 이 곳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고,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꽤 큰 욧트가 몇 척 정박해 있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요한 당시의 이 섬은 별도로 감옥이 있은 것이 아니고, 비교적  많은 자유가 유배자들에게 주어져서, 요한도 굴에서 거주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항구가 있는 스칼라(Skala)라는 곳에 집이 있었고, 동굴에는 기도와 명상을 위해 찾았다고 한다.

동굴에서 요한은 어떤 생각을 했으며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추측해본다. 비록 유배자의 신세이긴 해도,  요한은 박해의 피비린내나는 현장에서는 멀리 떨어져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자신의 형편을 다행으로 여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비교적 기독교인에 대해 관대하던 로마의 정책이 바뀌어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됬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갇히우고 죽어갔다. 이런 상황이 요한의 마음에 타는 안타까움을 자아냈을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야말로, 이와 같은 요한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록을 읽어보면, 박해중에 있는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었는 가, 실감이 된다. 지금은 비록 어려운 환난 중에 있지만, 믿음을 잃지 않고 조금만 참고 견뎌라... 그리하면 영원히 썩지 않는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 지금 있는 환난은 잠시 동안이며, 그리스도의 승리의 순간이 곧 올 것이다. 로마를 앞세운 사탄의 세력은 결국 멸망할 것이며, 눈물도, 슬픔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평화가 그리스도에 의해 곧 오게 된다!

이런 내용이 계시록의 메시지가 아닌가? 요한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는 또한 요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것인지.... 동굴에서 잠시 요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깨닫게 된 것이다. 요한은 18개월을 이 섬에 머물다가 에베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지라는 곳에 가보면 실망하게 되는 것이, 원래의 모습을 그냥 두지 않고 덧칠을 많이 해서, 그 신선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무덤을 요란하게 만들어 놓고, 그 무덤위에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세워놓고, 거기에 수없이 많은 동상이나, 조형물들을 만들어 놓아 원래의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밧모섬의 동굴은 그냥 동굴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동굴위 언덕 위에 11세기에 지은 수도원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는 아티나의 신전이 있었던 곳인데, 헐고 그 위에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푸스(Christopus)라는 수도승이 이 곳에 수도원을 지을 생각을 가졌으나, 전혀 재원이 마련되지 않아 고심을 하다가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인 알렉시우스1세를 찾아갔다고 한다.  성채 모습의 수도원은 이 섬의 가장 큰 건물이며, 섬 전체를 압도하는 위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해적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높은 담을 수도원 주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도원은 제 기능을 하고 있어서 수도사들을 만나 불 수는 있었으나, 말을 걸거나 접촉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수도원의 박물관에는 성상과, 성화, 그리고 많은 성물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마가복음 사본이었다. 양피지(Parchment)에 기록된 사본으로써 가장 오래된 사본 중의 하나라고 한다.

섬을 떠나 돌아오는 길은 좀 험했다. 파도가 세어지고, 바람도 많이 분다. 드디어 희생자가 발생했다. 일행 중에 유일한 약사인 Sarah가 멀미가 너무 심해 고생을 많이 했다. 그가 배가 떠나기 전, 우리 내외에게 멀미약을 주어서 우리는 무사했는데, 자신은 멀미약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오히려 고생을 한다.

밀레도


쿠사다시(Kusadasi)에 사흘을 머물었는데, 이틀째 밧모섬을 방문했고, 사흘 째는 프리에네(Priene)와 디두마 (Didyma), 그리고 밀레도 (Miletus)를 방문하였다. 프리에네는  고대에 매우 중요한 도시였으나 성서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어서 여기서는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디두마는 밀레도에서 아주 가까이 위치한 곳인데, 이 곳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어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이 곳도 성서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밀레도는 한 때 융성한 도시로써, 기원 전 6세기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의 지중해 관문의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에베소에 항구의 역할을 빼앗기게 되어 쇠퇴하였다가, 로마제국의 치하에서는 이 지역을 통괄하는 총독부가 위치하게 되어 다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항구로써의 기능을 잃게 된 것은 역시 강의 퇴적때문이었다. 원래는 4항구를 갖추고 지중해의 관문 역할을 하였으나, 강하류에 토사가 퇴적하면서, 항구였던 곳은 늪지대가 되었다. 지금 해안선은 원래 항구였던 곳으로부터 5마일이나 바다쪽으로 물러가 있다. 이 곳은 또한 유명한 과학자들, 철학자들, 건축가들이 모여 있던 이유로도 중요한 도시였다. 과학에 얽힌 재미 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탈레스(Thales)라는 과학자의 이야기였는데, 이 사람이 우연히 하루 중  태양이 일정한 곳에 이르게 되면, 그림자의 길이와 사람의 높이가 같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발견을 이용하여 이집트의 피라밑의 높이를 측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 곳 출신의 건축가 Hippodamus는 기원전 5세기에 이 도시를 재건할 때,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를 설계해서 후에 많은 도시들, 특히 지중해 지역의 도시들이 이 방식으로 도시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밀레도는 바둑판으로 되어 있어서, 거리들이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관심은 여전히 바울과의 연관에 있다. 밀레도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가면서 들린 곳이다. 그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초청해서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눈물의 작별을 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을 밀레도에서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한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목회를 회고하는 대목에서,  겸손과 눈물, 그리고 귀한 것은 무엇이든지 나누려고 했다는 그의 고백에  나의목회자로써의 삶을 비추어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바울과 에베소의 장로들이 다시 못 볼 것을 생각하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일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좀 더 오래 그 곳에 머무르고 싶어진다. 물론 저녁이 되기 전에 떠나야했지만.

잡소리


우리 일행 36명은 모두 크리스챤이다.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길을 나선 사람들이니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도 다섯 명이고,  나머지 사람들도 한국교회에서라면 모두 장로라고 불리웠을 사람들이다. 평신도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대부분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비교적 다 괜찮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사귀면서 교제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모두 하는 것 같다.

그렇기는 해도 여행이 길어지고 육체가 피곤해지면서 조금씩 인간의 본성이 보여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편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도 나타난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겉으로는 모두를 다 같이 대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만, 속에서는 불편한 사람도 있고 편한 사람도 있다. 우리 내외는 특히 같은 얼굴 모습을 가진 동양인들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 것도 영어가 조금은 서툰 사람이 편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싱가폴에서 온 부부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아가며 너무 가까운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여행의 끝이 가까워 오면서 식탁에도 같이 앉고, 외출도 같이 하는 일이 잦아진다. 참... 인종관계는 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래도 싱가폴 부부가 일행 중에 있어서 우리는 행복했다.

이 글은 이스탄불에서 쓴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지고 오늘은 블록을 두 개나 채운다. 즐거운 밤이다.



  

사데, 서머나(Izmir)

사데와 서머나(이즈밀)

사데(Sardis)


요한의 편지에서 "죽은 교회"라고 모진 책망을 받았던 사데 교회가 위치한 곳의 지금 이름은  사르디스(Sardis)이다. 로마치하에서 갈라디아지방(지금의 터키 중부)과 아시아( 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지방)를 연결하는 도시로써 교통의 요지였다. 원래 이 도시는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는데, 주전 6세기에 페르샤의 고레스왕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한다. 이 도시를 점령한 왕에 대한 예언이 이사야 41장에 나와있다고 우리를 인솔하는 Rasmussen박사가 설명하며 성경을 읽었는데, 정말 무섭게 닥치는 점령군의 묘사가 너무나 실감나는 경험을 하였다.

사데교회에 준 요한의 경고가운데, '내가 도적같이 이른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것도 사데의 역사에서 가져온 표현이라고 한다. 페르샤군이 사르디스를 침공할 때, 루디아군의 수비가 하도 단단해서 도저히 그 성을 뚫고 들어갈 길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대치상태가 수 개월이 지났을때, 성에서 한 병사가 비밀통로를 통해 나왔다가 들어가는 것을 페르샤군이 발견하게 되었고, 드디어 그 통로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함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기습공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빗대어, 요한은 사데교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갑자기 임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경고 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보니, 성경의 표현들은 당시 교인들의 삶의 현실이나, 또는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연관된 것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지순례의 유익이 바로 이런 배경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역시 사데의 구경거리도 주로 신전의 유적들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는 돌무더기들에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 사실 돌이란 가장 튼튼한 건축자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서 돌로 건축하면서 그 건축물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하는 것이겠지만, 가장 빨리 무너지는 건축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레코 로만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중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특히 터키에서 보는 건축물은 더 그렇다. 왜냐하면, 이 곳에는 지진이 많이 일어나서,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돌로 지은 것은 지진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런 건물에 하나님을 모셔 놓고, 영원히 계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돌보다도 약한 건축재라고 할 수 있는 목재가 차라리 더 오래 가지 않을 까 싶은데,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특히 돌을 선호하였다. 돌보다는 목재가, 목재보다는 짚과 같은 부드러운 자재가 지진에는 더 강했을 것이다. 돌 무더기 사이에서 피는 꽃들이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다.



사데의 유적 중 눈에 띄는 것은 단연히 체육관이다. 물론 원래의 건물은 다 무너졌으나, 복원된 건물이 대단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한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로마도 육체적 힘에 대한 동경이 강해서 체육행사가 많았다고 한다. 격투기를 비롯해서 권투, 달리기, 던지기와 같은 경기가 그리스 시대에 인기가 있었다는데, 로마시대에 와서 검투사, 짐승대 짐승, 인간대 짐승 사이의 싸움이 추가되었다. 잔인한 시대였다. 체육관에는 목욕시설, 화장실 시설까지 잘 갖추어져 있었다.

또 한 가지 구경거리는 왕의 도로 (Royal Road)이다. 페르샤 시대의 유적으로써, 이 곳 사데에서 페르샤의 수도였던 수사에 이르기까지 1,500마일의 거리에 달하는 하이웨이였다. 사람이 걸어서 3개월 걸리는 이 길을 왕의 보발군 (horseman)들은 9일에 주파를 했다고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위나 추위, 밤의 어두움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교대하며 달렸단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었다. 당시 페르샤 치하의 넓은 땅에 왕의 보발군들이 유대인을 죽이라는 칙령을 취소하는 또 하나의 칙령을 전하기 위해 밤낮을 달렸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돌기둥도 대단해 보이고, 그 정교한 조각 솜씨와 돌다루는 솜씨에 감탄하다가, 하도 많이 보게 되면, 이 것이나, 저것이나 다 비슷하게 보인다. 더구나 헬레니즘 시대나 로마시대의 도시 구조는 어느 도시건 거의 같다. 가장 높은 곳에 신전이 있고, 그 밑에 시장과 광장, 그 옆에 극장, 그리고 공회당, 때로는 어마어마한 목욕탕이다. 사데의 유적도 다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싫증이 나기 시작한 나는 신전 뒤 쪽 산등성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궁금해서 돌아가 본다.  양떼가 풀을 뜯고 있다. 양을 치는 목자가 나를 보더니, 오라고 손짓을 한다. 다가가 보니, 새끼양을 가르키며 한 번 안아보라고 손짓을 한다. 안아보니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너무나 좋다. 양을 내려놓는데, 서툰 영어로 목자는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더니, 목자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오 꼬레아, 브라더칸츄리!"하는 것이 아닌가? 기회가 있으면, 한국인으로써 터키를 여행하는 것이 어떤 경험인 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지금은 성지순례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서머나


서머나의 현재 이름은 이즈밀(Izmir)이다.  지금은 터키의 3대도시 중 하나로써, 30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곳이다. 이 곳에는 터키의 해군함대 사령부와 북대서양조약군 (NATO)의 함대 사령부가 있다.

도시가 하도 크게 발전하다 보니, 중요한 유적도 모두 도시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 서머나교회는  "부요한 교회"로 칭찬을 받았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유혹과 핍박을 견딘 일에 대해 요한은 칭찬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받을 환난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순교자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 곳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보다도 주후 2세기에 이 곳 교회의 감독을 지낸 폴리캅의 순교이야기가 더 유명하다. 나이가 86세에 이른 나이에 붙잡혀 운동장 한 복판에 세워졌는데, 총독이 그 나이를 고려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용서하리라고 살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모든 무신론자들을 저주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 명령은 들을 수 있었으나, 다시 그리스도를 부인하라는 명령에 폴리캅은 이와 같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내 평생 86년동안 내가 내 주의 종이 되어 살아는데,  주는 한 번도 내게 잘못한 일이 없소. 어찌 내가 나를 구원한 내 왕을  부인할 수 있겠소?"

그러고는 형틀에 매여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경험은 이 곳의 유대인의 시나고그에 갔을 때, 바닥에 그려져있는 원과 그 속의 직선들의 그림에 얽힌 것이다.  안내자는 이 그림이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비밀 암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희랍어로 잌수스라는 글자를 이 그림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잌수스는 물고기를 뜻하는 말이고, 그래서 물고기 형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시다."라는 문장의 각 단어 첫 글자를 합하면 물고기라는 단어가 된다. 그런데 이 물고기 상징이 사용된 용도에 얽힌 사연이 눈물 겨운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나서 물고기 상징의 윗쪽 곡선을 발로 그으면,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인 경우 그 의미를 알아채고, 아래쪽 곡선을 그어 응답했다는 것이다. 이 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목숨 내어 놓고 믿음을 지켰던 초대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미안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 글은 지금 여행이 다 끝나고 마지막 체류지인 이스탄불에서 쓰고 있다. 공식 일정은 끝났지만, 하루를 더 머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Thursday, May 29, 2014

버가모, 두아디라, 필라델피아

버가모, 두아디라, 필라델피아


이 번 여행의 주제는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이지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 교회가 있던 도시들도 여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같이 일생에 한 번이나 이런 여행을 할 수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다. 이 번 여행에서 알게 된 것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교회들은 에베소를 시작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차례를 따라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에게해에 면한 에베소, 서머나 다음에, 내륙으로 들어가서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그리고 라오디게아이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기억하기 쉽도록 이렇게 한 방향을 정해 도시들을  짚어 간 것이  내 경험에서 이해가 된다. 나도 내가 지나온 교회들을 기도할 때, 정해 놓은 순서를 따라 기도한다.  어떤 방향이 없이 기도하다보면, 놓치는 교회가 있기때문이다.

이제 기술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방문한 순서를 따른 것이다.

버가모


버가모는 성경에는 요한계시록에만 언급되고 있지만, 도시의 규모나 로마 제국에서의 위치로 보아 중요한 도시이다. 우리가 본 도시 중에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유적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이 도시에 대해 특기할 사항은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이 소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 도시에는 황제를 위한 신전이 두 군데나 있었다. 아우구스도와 트라얀을 위한 신전이다. 요한의편지 속에서 버가모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 사단은 바로 자신을 신격화한 로마황제를 가르키는 말이 된다.  황제를 섬기는 신전은 로마가 점령한 지역의 주민을 쇠뇌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트라얀 황제를 "바다와 땅의 주(kurios)"라고표현함으로써, 점령자는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것과 점령이 신의 뜻이라는 인식을 점령지 백성에게 주입시킨 것이다.  이런 일을 아마도 통치자들의 본거지인 로마시에서도 할 수 있었을까, 의심된다. 로마사람들에게는 황제가 세워지는 과정에, 신적 요소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적에 의해 황제가 암살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 황제로 세워지기도 하며, 무엇보다 원로원의 찬성을 받아야하는 황제의 자리를 신격화한다는 사실을 로마시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화가 끼일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점령지에서는 황제가 신으로 둔갑하였다. 참... 역사의 희극적인 면이 아닌가?

황제의 이름들을 비롯해서 모든 숭배대상은 흰 대리석에 새겨져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버가모교회의 교인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사람에게는 흰돌을 주고 그 위에 이름을 새겨주겠다고 한 것이다. 황제보다도 더 크고 영원한 영광을 얻게된다는 약속이다. 사실 당시의 크리스챤들, 특히 버가모와 같은 황제숭배가 성한 곳에서 살았던 크리스챤들에게는 박해가 특히 심했고 순교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요한의 편지에 '안디바'라는 순교자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그 한 예다. 그 박해는 도미시안 황제 때 극심했고,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챤 박해를 중지시키기 바로 전인 311년까지도 이 지역에는 박해가 심했다고 한다. 이런 형편에서 요한의 편지 속에 나오는 환상이 주는 예언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를 짐  작할 수 있다.

아티나 신전을 비롯해서 아폴로 신전, 그외에 황제를 모시는 신전이 있는 곳에서 초대기독교회의 박해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고 무거워지기까지 했는데, 그 다음 방문한 곳은 신전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른 곳이었다. 우리가 돌아보는 유적 중 유일한 병원의 유적이다. 물론 근대 개념의 병원과는 매우 다른 곳이지만, 수술실도 있고 회복실도 있고 물리치료실도 있는 곳이다. 특히 심리적인 치료도 중요하게 여겨서, 병원 부근에 펼쳐지는 풍경은 아주 평화로운 구릉지대이다. 완만한 언덕에 퍼피꽃이 만발한 풍경이 보기만해도 즐거워진다.  물이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는 이론에서 스파를 만들었다는 설명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믿음치료법이 관심을 끌었는데, 치료가 다 끝난 후에 "내가 고침을 받았다"고 환자에게 외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고침을 받았다는 확신이 치유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생각은 어제, 오늘에 생긴 이론이 아닌 것이다.

 특히 뱀이 치료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실제로 환자의 치료에 뱀을 이용한 기록이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뱀을 통해 치유된 사람이 많은 돈을 병원에 희사했다는 것이다. 신전 한 구석에 뱀을 조각해놓은 비석이 서있는 것을 보아 뱀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병원은 현대의 말로 병원이지 사실은 치유의 신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모시는 신의 이름은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인데,  치유의 신인 희랍신의 하나이다. 이 신의 이름을 따서 병원의이름을 아스클레온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병원의 명성과, 또 가장 유명한 의사인 2세기의 갈렌(Galen)의 존재때문에, 버가모 거리는 각 지에서 모여든 환자와 그 가족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면서, 아하 그래서 병원을 상징하는 엠블렘에 뱀이 들어간 것이로구나, 또 하나 배웠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시설의 병원과 의사들이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치료에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일과, 사탄의 상징인 뱀과 같은 존재를 섬기는 일이 동원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시대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생각이 되면서, 또 한 편으로는 그렇게 지켜낸 믿음은 얼마나 순수하며 강한 것인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두아디라 (Thyatira)


버가모의 화려하고 광대한 유적을 보고 두아디라에 가보니, 남아 있는 유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이 곳이 빌립보 교회의 주역이었던 자주장사 루디아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그 연관에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이방인 루디아가 빌립보 성밖에 강가에서 안식일에 기도하려 나갔을까? 그 해답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을 우리는 안내의 설명을 통해 듣게 되었다. 일찌기 이 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이방인들 중, 할례를 받거나 유대혈통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유대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God fearer)라고 불렀다는데, 루디아의 집안이 이런 집안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 확실한 연관은 어찌 알겠는가? 그럴듯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우리가 찾은 필라델피아의 유적은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의 잔해였다. 시내 한 가운데 어마어마하게 큰 벽돌기둥 네개가 서있었을 뿐 별다른 유적이 없었다. 이 도시는 동서를 관통하는 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인근에 버가모와 사데 같은 큰 도시들에 가리워져 크게 번성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황제를 섬기는 황제숭배의 신전은 다른 곳보다는 훨씬 늦은  3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세워졌다고 한다.

유대인의 회당이 소아시아 지역에 있은 사연도 흥미로웠다. 이 곳을 브리기아 지역이라고 하는데, 루디아 왕국이 오래동안 통치한 곳이다.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옛 왕국의 회복을 꾀하는 반란군들의 반항이 심했다고 한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로마의 황제와 이 지역의 총독이 한 전략을 낸 것이, 유대인 이주이다. 바빌론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 2,000가구를 이 곳에 이주시킨 것이다. 그 것은 유대인들이 비교적 법을 잘 지키고, 협조를 잘 하여, 사납게 날뛰는 폭도와 같은 이 곳 주민들에게 모범을 삼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대신, 유대인들에게는 땅도 주고, 10년간 세금도 면제해주고, 시민으로써의 권리행사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아시아 지역에 유대교 회당들이 많이 서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하면서,  가능하면 유대교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게 된 사연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유대교회당이 있었던 이유로 이 곳의 교회는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대항하여 싸워야했다는 사실을 요한의 편지는 암시하고 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이 도시는 기독교 신앙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도시의 환경이 이 곳에 살던 크리스챤들에게는 좋게 작용한 것일까? 요한의 편지에서 필라델피아교회는 책망받은 일은 없고, 칭찬 뿐이다.

잡소리 


너무 많이 걸으니 발과 다리가 아프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기침은 좀 잦아들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이 여행을 끝까지 마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는데, 그런 염려는 이제 사라졌다. 과연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경험을 또 다시 하는 것이다.

네델란드 헤이그의 이준기념교회에서 다음 주일에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여행 떠나기 직전에 받았었는데, 어제 이메일이 와서 설교 원고를 보내달라고 한다. 참 그 담임 목사님(최영묵목사)도 인정사정 보아주질 않는다. 여행 중에 어떻게 설교 원고를 작성해서 보내나? 오늘도 잠자기는 글렀다. 설교원고를 작성을 해아하니....

이 글은 지중해 연안 터키 남쪽의 항구도시 안탈리아(Antalya)에서 쓴다. 바울이 드나들던 앗달리아 항구가 바로 이 도시에 있었다.








 

Sunday, May 25, 2014

드로아와 앗소를 가다

드로아와 앗소를 가다

 

드로아(Troas)


카나칼레에서 아침 일찍 버스는 우리를 싣고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이 도시도 역시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도시중 하나이다)를 향해 떠났다. 마음이 설렌다. 사도 바울에 행적에 관해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도시 중에 드로아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에베소에 버금가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드로아는 한 때, 융성한 도시였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들이 소아시아와 유럽대륙을 바다를 건너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이 곳을 제국의 수도로 삼으려고 생각했던 것을 보아 위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로부터 이 곳에 수도를 옮길 계획을 구체적으로 가졌으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발견한 후, 그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로 택함을 받지 못한 이 후 급격히 도시는 쇠락했고, 게다가 내항, 외항의 두 항구가 모두 토사에 묻혀 항구로써의 생명도 끝이 났다. 터키 서해안, 에게해를 향해 흐르는 큰 강이 모두 다섯이라는데, 강이 바다와 만나
는 곳에 위치해 번영했던 항구들이 지금은 육지가 되어 있는 기막힌 사정이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강하류에 토사가 쌓이는 현상(slit)으로, 해안이 조금씩 바다쪽으로 밀려 나간 결과이다. 드로아가 바로 그런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달리안(Dalyan)이라는 조그만 마을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항구였던 곳에 가보니, 옛날 내항은 연못이 되어 있었고 그 주위로 염소와 양들이 유유히 풀을 뜯는 초원이 되어 있었다. 항구의 유적은 돌들로 남아  풀밭에서 또는 물가에서 딩굴고 있었다.  강을 준설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교훈이라 할까?


드로아의 역사적, 혹은 지리적 중요성보다도 우리 바울의 행적을 좇는 순례객들에게는 이 도시가 바울과 어떻게 관련되는가가 더 중요한 관심사이다. 신약성경에는 모두 네 번 드로아와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1)사도행전16: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서 머무는 중에 밤에 환상 속에서  마게도니아 사람이 손을 흔들며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청원을 듣게 된다. 원래 그는 흑해(Black Sea)연안의 비두니아 지역을 가려고 계획했는데, 어쩐 일인지 성령이 그 일을 허락하지 않아 답답해 있던 차였다. 이 환상 후에 물론 바울은 그의 일행과  유럽의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던 네압볼리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원래 바울과 동행했던 실라와 디모데 외에 누가가 동참하여 여기서부터 소위 사도행전의 "we"부분이 시작된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 부분에서 바울 일행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이란 1인칭 복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2)사도행전 20: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길에 드로아에 7일간 묵은 이야기가 나온다. 바울의 체류 중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는 그의 강론이 너무 길어지면서, 청년 유드고(이름의 뜻이 "행운아"이다)가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이야기다. 당시 3층 집은 개인의 주택이기보다는 일종의 아파트로써 insula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주거형태였다고 한다. 바울은 내일이면 이제 이 사람들과 헤어져야한다는 급한 마음으로 밤새 강론했겠지만, 노동으로 피곤하고, 촛불로 더워진 방에서 나른한 몸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젊은 이의 사정이 애닲게 다가온다. 물론 이 젊은 이는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보살핌으로 그 생명을 다시 찾게 된다.

3)고린도후서 2:12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간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린도에 보낸 이 편지의 내용으로는  이미 드로아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3차 전도여행 중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4)디모데 후서 4:13 바울이 생애의 거의 마지막이 되어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말 중,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오라는 내용이 있다. 바울이 말년에 드로아에 얼마 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말이다.

드로아에서 바울의 발자취를 찾으면서 한 가지 아리하게 다가오는 그의 심정이 느껴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어떤 말을 하였을까? 바울의 마음은 대단히 번민으로 가득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박해가 뻔히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그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도움을 청하기 보다는, 그 귀한 마지막 시간을,  온 힘을 당해 드로아 교회의 교인들을 권고하고, 복음에 굳게 설 것을 부탁하는 일에 사용하였다. 정말로 자기 사명에 철저히 촛점을 맞춘 삶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가?  바다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을 그를 생각하며 나도 바닷가 돌기둥위에 앉아본다. 수년 전 드로아에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마게도니아로 떠난 그가, 이제는 같은 자리에서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런지 모르는 채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로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와 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에서 그 고난의 잔을 앞에두고 번민하며 기도했던 것과 같이, 드로아에서 바울은 이제 고난의 장소를 향해 가겠다는 비장한 마음을 기도하며 다지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였을까 하는 것을 도보로 다음 행선지인 앗소까지 가겠다고 고집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바울은 칠 팔명되는 그의 일행을 먼저 앗소로 배를 태워 보내고 자신은 걸어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왜 자기는 혼자 걸어간 것일까? 드로아에 옛 도로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 곳을 우리는 잠시 걸었다. 고난을 향해 가라는 주의 뜻을 씹고 삭이고, 씹고 삭이는 과정이 그 길 위에 있었다. 바울이 우리의 선생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거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핑계가 많은 경우에라도, 결국은 순종으로 나아간 것이다.

드로아 항구 자리를 돌아본 후에 안내자는 우리를 고대의 채석장이 있었던 유적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스와 터키의 유적들은 대부분 신전이나, 시장, 운동장, 극장과 강당들인데, 놀라운 것은 모두가 석조라는 것이다. 고대 건축에 채석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이 채석장에도 가보니, 미처 사용하지 못한 돌기둥들이 산 중턱에 딩굴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저렇게 큰 돌을 산에서 떴으며,  돌기둥을 만들었을 것인가?  또 그 만든 돌기둥들을 어떻게 건축현장에까지 운반했을까? 건축현장에서는 이 돌들을 다시 다듬고 세우고 쌓는 일을 누가 한 것인가?  나는 또 부아가 난다. 건축을 설계한 사람, 돈을 댄 사람, 섬기는 신의 이름, 당시의 지배자의 이름들은 남아 있는데, 실제로 노동한 사람들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다. 석공들이여, 노예들이여, 건축노동자들이여, 이 일을 가능하게 한 엔지니어, 그대들이야말로 위대하다고 외치고 싶다.

앗소(ASso)


드로아에서 20마일 남쪽에 앗소가 위치해 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이 곳까지 도보로 걸어온 후에 배를 타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과  합류했던 바로 그 곳이다.

희랍시대의 도시들은 대부분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다녀본 바로는 제일 인기 있었던 신들은 아티나(Athena), 아폴로(Apollo), 아르데미스(Artemis)등이다. 앗소에는 아티나 신전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산위에 도시가 있었고, 그 꼭대기에 신전이 있어서, 오르막 길을 꽤 길게 올라야했다. 그러나 이제 여행이 10일째를 넘어 가면서, 신전 구경도 좀 시들해진다. 건축기술이나, 규모에 놀라는 것도 처음 몇 일, 신기한 것도 자주 보면 무감각해지는가?

그 동안 배운 것 한 가지는, 기둥의 모양으로 건축시대를 분별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희랍시대의 기둥 위에 얹혀지는 크라운의 모양에 대해 배웠는데, 그 것이 디자인의 차이일 뿐 아니라, 문명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전 6세기 까지는 도리아식 기둥으로 크라운의 모양이 지극히 단순하고, 중후한 모양을 나타낸다. 헬레니즘의 전성기인 주전 5세기 이후에는 크라운의 양쪽이 말려올라간 모양의 이오니안 기둥이 유행하였다. 기둥에는 홈이 파져서 훨씬 화려한 모양을 가진다. 로마 시대인 주전 2세기 부터 몇 백년 동안에는 가장 화려한 문양을 가진 고린도식 기둥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고린도식 크라운에는 식물의 잎이나 꽃 문양이 사용되었고 세 기둥 중에서 가장 화려한 모양을 가진다. 다 이 것이 안내자로부터 귀동냥으로 배워 안 것이다. 질문을 많이 하는 나를 Tulu 여사는 귀찮아하지 않아 고마움을 느낀다.

앗소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산과 바다가 만나는 좁은 지역에 호텔들이 들어서 있었다. 돌로 지은 호텔에 고풍이 풍기고, 이제까지 묵었던 화려한 현대식 호텔에 비해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다리와 발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Friday, May 23, 2014

터키로 들어가다

터키를 향하여.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 유럽에 들어가면서 첫 발을 디딘 곳이 네압볼리(Neapolis)인데 이 곳이 오늘의 카발라이다. 네압볼리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면서 크리스토폴리스가 되었다가 이슬람 오토만 제국의 치하에서 카발라가 되었다고 한다. 카발라는 역(Station)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옛날,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오가는 군인들이나 여행객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6년 전 이 곳에서 하룻밤 지낸 추억이 있다. 그 때, 잔잔하고 푸른 에게해에 발을 담그며 바울의 유럽 상륙때의 심정을 느껴 보려고 했었다. 오늘은 터키로 향하여 가면서, 시내를 돌며, 항구에 잠시 들렀다. 어떤 항구든지 나그네에게는 낭만의 장소이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위한 장소이지만, 나그네들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도착했던 항구는 '옛 항구'라는 이름으로 조그마한 어항이 되어 있었고  여객선과 큰 화물선을 위한 큰 항구는 물론 '새 항구'라는 이름으로 따로  있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꿈에 본 환상만 믿고,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 바울의 용기는 새로운 세계를 점령했던 왕들이나, 망망대해를  탐험한 컬럼버스에 비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군왕들은 군사력을 의지했고, 항해사들은 경험과 기술, 그리고 전수받은 지식을 의지했지만, 바울이 의지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뿐이 아닌가?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모두의 선생이 된다.

뻐스는 계속해서 달려 그리스와 터키 국경에 가까운 알렉산드로폴리스(Alexandroupolis)라는 도시에 멈춘다. 이 곳에서 하룻 밤을 지내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점령하면서, 많은 도시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안내자의 이야기로는 전부 18곳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글쎄... 그렇게나 많이?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아무튼 우리가 묵게 되는 이 도시는 알렉산더의 후광이 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알렉산더의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써, 로마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크기로도 로마에 이어 두 번째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략은 그의 정책에서 나타난다. 그는 군사적인 점령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점령지역마다, 그리스의 문화를 온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철학,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들만 아니라, 연극, 음악등을 전수할 문화인, 그리고 농사법이나 온갖 기구를 제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농부나 대장쟁이까지 다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희랍의 지배가 끝나고,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어도, 문화와 정신적인 세계는 여전히 희랍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참.... 아리스토틀이 그의 가정교사였다고 하니, 그런 가정교사를 붙여준, 부모를 칭찬해야하나?

이틑날 아침 일찍, 터키를 향해 떠났다. 그리스와 터키는 과거 여러 가지 문제로 다툰 적도 있고, 더구나 400년 넘는 세월을 터키의 오토만 제국의 그리스 지배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리스에 속한 섬들이 터키 코앞에 있어서 터키의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터키는 서방 유럽과 군사동맹을 맺은 NATO회원국이지만, 아직 EU회원국은 아니다. 그리스가 비토권을 행사하며, 터키가 EU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터키의 노력이 번번히 좌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경을 통과하는 일은 의례적인 수속만이 필요했다. 다만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했던 것과, 터키 국경을 지나면서 새 안내자와  순례객이 두 사람 합류한 것이 새로운 일이 되었다. 국경에서 우리와 합류한 새 식구는 캐나다에서 온 부부로써, 이스라엘에서의 두 주간의 순례를 마치고, 내친김에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는 선교여행에까지 따라 나선 것이다. 안내자는 터키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는 툴루(Tulu)여사이다.

터키는 희랍시대부터 아나톨리아(Anatolya)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해뜨는 동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도 터키를 가르키는 말로 아나톨리아는 많이 쓰여지고 있다. 인구는 8천만에 가깝고, 영토는 미국의 텍사스정도로 넓다. 한국에 비해서는 매우 넉넉한 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국경을 지나니, 그리스에 비해 거의 빈 땅이 보이지 않는다. 농사가 활발한 지역이라는 첫 인상을 가지게 된다. 한 시간 남짓 달려서 엣세아바트(Eceabat)라는 항구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카나칼레(Canakkale)라는 건너 편 항구에 30분 정도 훼리 보트를 타고  달다니엘스해협을 건너 유럽에서 아시아에 드디어 상륙한 것이다. 이제 터키에서의 본격적 여정이 시작된 셈이다.

트로이(Troia)

아시아 쪽 터키에 도착해서 처음 들른 곳은  호머의 일리아드로 유명해진 트로이(Troy)였다. 성서와 관련된 지역은 아니지만, 하도 유명한 곳이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곳이다. 트로이의 유적은 모두 8층으로 나뉘는데, 오랜 세월에 결쳐서 한 시기의 무너진 건축물의 토대 위에 또 다른 문명의 건축이 이루어져서 8개의 다른 층이 발겨된 것이다. 트로이가 번영한 사연이 흥미로웠다. 이 곳은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었으나, 북서편으로 항해하기에는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는 날들이 많이 바다가 너무 거칠어 항해가 위험해진다고한다. 이 지역의 바람이 얼마나 센가는 도시의 별명이 "바람 센 트로이" (Windy Troy)였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우리들이 유적을 돌아보는 중에도 정말 바람이 강했다.  바람과 파도가 너무 거셀 때, 배들은 트로이 항구에서 바다가 잔잔해기를 기다려야했단다. 그들이 정박해 기다리는 동안에 트로이에서 필요한 식품이나 물품들을 구입해야했고, 배를 타고 건너려는 승객들은 도시에서 거처를 구해야했던 것이 도시 번영의 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 이렇게 부자가 되는 길도 있었다니...

유적지 한 복판에 트로이 전쟁에 쓰였다는 목마의 모조품이 서있었다. 건물 3층 높이의 나무로 만든 조각품이다. 실제로 이런 목마가 어떻게 전쟁터에서 운반되었는가, 상상이 안되지만, 구경거리로써는 충분히 흥미를 주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풍경은 동네를 지날 때 마다 보이는 모스크이다. 유럽을 다녀보면 동네마다 교회의 모습이 보이는 것과 같이 이 곳의 동네마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다 모스크가 있다. 터키는 회교가 국교가 되어 인구의 95%이상이 모슬렘이고, 타종교의 존재를 허용은 하면서도 전도활동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슬렘 중에서도 절반은 개방적이고 절반은 보수적이어서, 상호 견제가 심해 다른 모슬렘 국가와 같은 종교 박해는 없는 것 같다. 정치도 세속정치로 제도가 되어 있으나, 보수적인 사람들에 의해 모슬렘  정치제도로 바꾸려는 운동이 거세다고 한다. 모스크에서 하루 다섯번씩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나오지만, 실제로 그 소리를 듣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안내자의 말을 들어보니, 성일인 금요일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아도, 평일에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터키에서의 첫날이 끝났다. 카나칼레(Canakkale)라는 항구도시에서 터키의 첫 밤을 보낸다.








Wednesday, May 21, 2014

베르기나, 베레아,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르기나, 베레아, 빌립보, 데살로니카

 

빌립 II세의 무덤에 가다


메테오라를 떠나 두어시간 뻐스로 달려가니, 베르기나(Vergina)라는 곳에 이르렀다.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로 알려진 빌립II세 (Phillip II)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알렉산더대왕이 유명한 것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희랍역사에 중요한 인물인가를 안내자는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가 마게도니아의 왕으로써, 고대 희랍을 주전 4세기에 통일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목소리에 거의 울분에 가까운 힘이 들어간다. 왜 그 사실을 그리도 강조하고 힘을 주어 이야기하는 가, 의문이 생겼는데, 곧 풀렸다. 마게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가 가까이 있어서 마게도니아가 그리스의 일부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1989년 해체된 후 연방에 속했던 각 나라가 독립을 한 것인데, 그 중 하나가 마게도니아이다. 혹시라도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이 최근에 독립한 그 마게도니아가 원래 고대 역사의 마게도니아라고 오해를 할까봐 걱정이 된 것인가? 참, 이웃한 나라끼리 진정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어느 곳을 보아도 이웃한 나라사이에 역사 왜곡, 영토분쟁, 과거사 청산문제가 없는 곳이 드물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전쟁도구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든다는데, 언제 그 날이 오려나....

빌립 II세의 무덤은 우리 나라 경주의 신라 왕들의 무덤과 크기와 모양이 비슷했다. 빌립 II세는 자기를 경호하는 부하에게 암살을 당하고 그 시신은 화장을 했다는데, 죽을 때의 나이가 40세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잔치를 큰 운동장에서 열게 되는데, 그 축하연에 참석하러 가던 중에 자신을 경호하던 부하로부터 공격을 당해 죽었다고 한다. 그 경호원도 곧 죽임을 당해, 그 살해의 배후가 누군지를 영영 밝히지 못한 채, 온갖 추측만 무성하단다.

안내자의  설명 속에 유달리 많이 나오는 사람들은 왕과 장군들이다. 그리스의 역사는 결국 전쟁과 정복의 역사인 듯하다. 도대체, 정말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영웅들의 전쟁무용담과, 왕위를 둘러싼 음모와 패자들의 비극, 복수의 악순환... 그렇게 이어져오는 것인가? 인류의 살아온 모습을 기록된 역사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 부정확한 것이다. 절대 다수인 평민들의 애환, 사랑, 우정... 가난 속에서도 나누며 오손 도손 살아간 이야기가 정말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역사, 특히 서구 역사는 너무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는 생각을 필립 2세의 무덤에서도 다시 하게 된다. 그리스의 전쟁이야기는 주로 도시 국가들의 통일과정에 얽힌 이야기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 또 중세에 와서는 터키의 전신인 오토만 제국의 침공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근대사에서는 발칸반도에서 있었던 1차 세계대전과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던 2차 세계 대전의 이야기가 있다. 무슨 역사가 싸움한 이야기로만 엮여지는 것인가?

하기는,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거리가 되는가? 영화 중에도 전쟁이건 무사나 갱단의 싸움이건 싸움이 주제가 된 것이 인기가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이와 같이 잔인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들고 세계를 향해 외친 평화의 외침은 얼마나 두터운 벽을 넘어야했는가?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온 몸을 바쳐 헌신한 그 일에 오늘 우리들도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숙연해진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미케네 왕조의 한 왕이 묻혔다는 무덤에도 들렸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도 넘는 옛날에 조성된 무덤으로써는 그 규모와 건축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왕의 무덤에 얽힌 전쟁이야기에 싫증이 난다. 이제 그만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의 여행취지에 맞는 여정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도, 인솔자도우리의 이런 간절한 심정을 눈치 챘는가, 아니면 일정이 바쁜 것인가, 서둘러 베뢰아로 뻐스를 돌려 달려간다.

베뢰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겨우 3주를 그 곳에서 지나고 베레아로 향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그 베레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 내외는 6년 전 캠핑카로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들렸던 곳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바울의 방문을 기념하는 벽화와 동상이 우리를 맞아준다. 베레아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중요한 곳이지만, 그를 기념하는 제단밖에는 그의 방문을 특별히 확인해주는 역사물이 없다. 그의 동상의 얼굴에는 매우 진지하고 슬픈 표정이 나타난다. 이런 모습의 바울은 과연 실제 바울과 얼마나 비슷한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세기말 즈음에 바울의 모습에 대한 대체적인 합의가 형성된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은 성경 중에 바울의 묵시록이라는 문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 문서에 바울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그가 이고니움(Iconium)에 도달했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란다. 그 묘사에 의하면 그의 키는 작았고, 머리는 벗겨졌고, 인상은 근엄했다는 것이다. 아, 또 한 가지, 눈섭이 두 개가 아니라, 한 개였다던가? 이런 묘사가 근거가 되어 지금도 희랍 정교회당에 가면, 바울의 이런 모습이 벽화나 동상, 혹은 후레스코에 나타난다.

 

데살로니카


데살로니카는 지금은 데살로니키Thessaloniki)로 불리운다. 그리스의 두 번 째 큰 도시로써 200만의 인구를 자랑한다. 데살로니카는 동서양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써, 옛날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II세가 이 지역을 평정한 후 자기의 딸의 이름을 따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동서양의 교역로가 되는 이 지역은  탐내는 자들간에 전쟁이 많았던 곳이고, 따라서 이 지역의 이름난 고대 유적들은 성곽, 망루와 같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다. 로마 시대에는 평화가 지속되어, 그 시대의 유적들은 시장터, 운동시설, 싸우나와 같은 경제적인 번영과 평화를 누렸던 흔적들이다. 도시의 한 가운데를 지나갔던 로마에서부터,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을 잇는 Via Egnatia 대로도 중요한 유적이다. 물론 바울의 시대부터 교회가 세워져 초대 교회의 유적도 많다. 유대인들의 커뮤니티는 일찍부터 존재해서 바울이 이 곳에 왔을 때는 벌써 꽤 큰 규모의 유대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울이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 이미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던 유대교 회당에서 첫 전도를 하게 되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야했다.

유대인의 이야기는 어디 가서 들으나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 이 지역을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6만명의 유대인을 폴란드의 집단 수용소로 끌고 간 후 많은 사람이 수용소에서 죽었고, 그 중 이 곳에 다시 돌아온 사람이 2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유대인 공동체는 성장해서 유대인들의 이 곳에서의 존재는 큰 비중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인의 명절을 도시 전체가 함께 기념한다고 한다는 것이 우리를 안내한 Voula여사의 설명이다. 이스라엘과 그리스의 관계가 밀접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바울이 이 곳에서 3주를 지나는 동안에 전한 복음의 씨가 자라나 이 지역의 중심교회가 데살로니가에 세워지는 이야기가 성경에는 나온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그가 이 교회를 얼마나 중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계속해서기독교회는 이 곳에 존재해 왔고, 4세기에 세워진 교회건물이 아직도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지진이나 화재, 또는 붕괴등으로 기둥 일부와, 건물의 기초와 벽만 남아있지만, 가능한한 그 것들을 다시 사용하여 옛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색갈이 다른 기둥들과, 벽의 자재가 다른 부분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이 곳에 뿌리 내린 기독교회는 이렇게 2천년 가까이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온다.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들이 다 사라진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빌립보


빌립보 유적에 들어서자 마자 우리는 6년 전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캠핑카를 몰고, 지도를 보고 또 보며 이 곳을 찾았던 우리의 모습은 어찌 보면 처량하기도 했었다. 유적을 둘러 보면서도, 안내가 없으니 인터넽에서 찾은 정보를 의지해서, 나름대로 추측해가며, 이 곳에서 바울의 흔적을 찾으려 했었다. 그러나 이제 34명의 동료 순례자들과 유능한 안내인과 함께 이 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날 로마의 대로, Via Egnatia를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는 심정으로 잠시 걸어본다. 안내자는 열심히 옛 도시의 이 모 저모를 설명하느라 목이 쉴 지경이지만, 나는 일행을 잠시 떠나, 옛날 시장터 한 가운데 서서 2천년 전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바울의 소리를 들으려고도 마음을 집중해본다. 이렇게 해보느라면, 그의 열정과 믿음을 조금이라도 전수받을 수 있을까 싶은 심정으로.

역시 안내자와 성서전문가를 모시고 다니니, 그 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중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빌립보에서 전도하던 바울이 귀신 들린 점쟁이 여자노예를 고친 이야기의 배경이다. 안내자가 희랍어 성경을 읽어가며 우리에게 설명한 것은 이렇다.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 일행을 따라 다니며 며칠을 계속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소리를 질렀다고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울 일행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들을 빌립보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소개한 것이 아닌가?  안내자의 말로는 이 귀신의 명칭은 델피 신전에서 사람들에게 신탁을 전하던 예언의 신의 이름과 같은 것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은 희랍세계에서는 제우스를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길이라는 표현도 바울이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그리스도를 통한, '다른 이름으로써는 이룰 수 없는' 구원의 도 (The way of salvation)가 아니라, 여러 가지 구원의 도 중의 하나(a way)를 전한다는 의미로 들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종의 증언은 바울과 그의 복음을 매우 왜곡하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귀신의 방해를 알아채고, 그 여종 속에서 장난하는 귀신을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흠.... 성경의 이 부분을 읽을 때, 왜 바울이 그렇게 역정을 내면서 자기를 좋게 소개하는 여종을 꾸짖었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듯 하다. 희랍인 안내자가 성서의 원어인 희랍어를  인용하며, 설명하니, 역시 실감이 난다.

바울 일행이 무릅써야 했던 난관과 도전은 이아 같은 귀신의 방해만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고침받은 여자 노예의 주인들의 보복으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사도행전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빌립보 고대 유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옛 교회 건물이다. 물론 지금은 벽의 일부와 기둥, 그리고 바닥정도만 남아 있는 유적이지만, 다른 것들은 지하에 묻혔거나, 쓰러졌거나 부서져서 돌무더기가 되었지만, 이 교회 건물은 그런대로 옛날의 영광을 보전하고 있었다. 그 전에 전혀 이 교회의 역사를 모르고 보았을 때에는 그 옛날에 꽤 근사한 건물을 지었네, 감탄하고 지나갔지만, 이 번에 건물에 얽힌 역사를 듣고 보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주후 6세기,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이 건물의 원래 설계는 제단 위에 돔 지붕을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돔 지붕을 가진 건물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성당뿐으로,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계획이었다. 결국  몇 차례 시도 끝에 돔 지붕을 올리긴 했으나 겨우 올린 돔 지붕이 아뿔싸!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 그 후 다시 돔을 세우지 못한 채, 절반도 안되는 면적의 예배실을 만들어 교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어보자는 야심으로 시작한 돔 예배당 건축이  실패로 끝났을 때,  당시의 교인들은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궁금하다. 나 자신 하와이에서 목회하면서, 근사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고 외치며 교인들을 독려하며 설교했었는데, 그래서 근사한 예배당이 지어지긴 했는데, 그 것이 과연 그렇게 가치있는 일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 경험을 가졌다. 신앙의 성숙은 없고,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는 일과 건물 세우는 일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버린 채, 건축에 몰두하는 실수를 많은 교회가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한가지 교회 건물에 얽힌 이야기는 8각형 교회에 관한 것이다. 빌립보 유적 발굴현장 한 구석에 옛 교회의 바닥에 있던 모자이크가 보전되어 있었다. 교회의 터가 8각형이어서 8각형 교회 (Octagonal Chuch)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유적이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니,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이 교회는 공인 후 초기의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면적이 매우 적은 것으로 보아 작은 건물이었을 것인데, 제단도 없고, 다른 방도 없이, 8면으로 이루어진 집회실 하나가 교회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8면으로 되어진 벽을 따라, 모두가 같은 눈 높이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예배했을 것이다. 교회에 직급이 생기고, 장엄한 의식이 생기고 사제들, 특히 주교들은 황제의 의복을 흉내낸 예복을 입는 것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진 것이라는 것이다. 주후 4세기 초에 세워진 이 교회와, 예를 들어 주후 6세기에 세워진 앞에 이야기한 교회는 그 크기와 화려함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은근히 안내자의 설명 속에는,  매우 제도화되고, 화려한 건물과, 사제 중심의 교회 운영으로 특징지워지는 그리스 국교, 정교회에 대한 비판이 배어있다.

설명이 끝난 후, 내가 질문하기를, "당신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으로써,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 정교회(Orthodox) 교인이 이 자리에 서서 안내설명을 했어도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요?" 우리의 친절한 안내자 Voula여사는 무엇인가 숨기고 있던 것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같은 사실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른 설명이 나오게 된다. 아뭏든 우리 안내자는 그리스에서는 인구의 0.6%밖에 안되는 소위 Evangelical Christian으로써, 대부분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에서 온 우리 그룹에는 잘 맞는 안내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 95%를 차지하는 그리스 정교회 교인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엄청나게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보존되어온 예배 의식과 제도, 사제들의 권위와 역할이 철저하게 보호되어 온 교회 운영, 교회 안을 가득 메운 온갖 성상들과 성화... 이런 것들이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빌립보 유적을 떠나서, 전에 방문하지 못해서 참 아쉬웠던 루디아 교회를 찾았다. 옛 빌립보 성 밖, 강물이 흐르는 곳이 모두 세 곳이 있다는 데, 그 중 가장 그럴듯 하게 생각되는 한 곳을 루디아와 그의 일행이 바울 일행을 만났던 곳으로 추정해서 성지로 삼은 곳이다. 참으로 지금도 물살이 제법 빠르게 흐르는, 그러나 사람 무릎 정도의 깊이 밖에 안되는 강가, 사도행전의 묘사와 매우 그럴 사 하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 옛날, 바울이 안식일에 기도하려 갔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흐르는 물 소리가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서 온 성지순례단 한 그룹을 만났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오셨단다. 이 번 여행에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잡소리


그리스 여행 중에 자주 눈에 띄는 것 하나는 거리에 자유롭게 나다니는 개와 고양이들이다. 특히 개들이 많다. 아주 순해서 가까이 다가와도 조금도 겁이 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목줄도 없이 다니는 개들은 신고만하면 동물 관리하는 사람들이 와서 잡아가는데, 이 곳 개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한다. 영양상태도 좋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는 모양이다. 필립 2세 무덤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는데, 내 발치에 순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밥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안 주자니, 너무 야박스러운 것 같고 주자니 버릇될 것 같아서 마음 고생을 좀 했다. 그리스 개 팔자는 정말 상팔자다. 미국에서는 street dog이라고 불리우고, 한국에서는 보신탕 거리가 될 것인데, 그리스에서는 동네 개 (community dog)로써 엄연히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는 그만 자야겠다. 기침이 심해 더 쓸 수가 없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주여 도우소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올림푸스산



                               카발라 (사도행전의 네압볼리) 풍경

                         카발라 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