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기나, 베레아, 빌립보, 데살로니카
빌립 II세의 무덤에 가다

메테오라를 떠나 두어시간 뻐스로 달려가니, 베르기나(Vergina)라는 곳에 이르렀다.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로 알려진 빌립II세 (Phillip II)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알렉산더대왕이 유명한 것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희랍역사에 중요한 인물인가를 안내자는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가 마게도니아의 왕으로써, 고대 희랍을 주전 4세기에 통일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목소리에 거의 울분에 가까운 힘이 들어간다. 왜 그 사실을 그리도 강조하고 힘을 주어 이야기하는 가, 의문이 생겼는데, 곧 풀렸다. 마게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가 가까이 있어서 마게도니아가 그리스의 일부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1989년 해체된 후 연방에 속했던 각 나라가 독립을 한 것인데, 그 중 하나가 마게도니아이다. 혹시라도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이 최근에 독립한 그 마게도니아가 원래 고대 역사의 마게도니아라고 오해를 할까봐 걱정이 된 것인가? 참, 이웃한 나라끼리 진정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어느 곳을 보아도 이웃한 나라사이에 역사 왜곡, 영토분쟁, 과거사 청산문제가 없는 곳이 드물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전쟁도구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든다는데, 언제 그 날이 오려나....
빌립 II세의 무덤은 우리 나라 경주의 신라 왕들의 무덤과 크기와 모양이 비슷했다. 빌립 II세는 자기를 경호하는 부하에게 암살을 당하고 그 시신은 화장을 했다는데, 죽을 때의 나이가 40세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잔치를 큰 운동장에서 열게 되는데, 그 축하연에 참석하러 가던 중에 자신을 경호하던 부하로부터 공격을 당해 죽었다고 한다. 그 경호원도 곧 죽임을 당해, 그 살해의 배후가 누군지를 영영 밝히지 못한 채, 온갖 추측만 무성하단다.
안내자의 설명 속에 유달리 많이 나오는 사람들은 왕과 장군들이다. 그리스의 역사는 결국 전쟁과 정복의 역사인 듯하다. 도대체, 정말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영웅들의 전쟁무용담과, 왕위를 둘러싼 음모와 패자들의 비극, 복수의 악순환... 그렇게 이어져오는 것인가? 인류의 살아온 모습을 기록된 역사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 부정확한 것이다. 절대 다수인 평민들의 애환, 사랑, 우정... 가난 속에서도 나누며 오손 도손 살아간 이야기가 정말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역사, 특히 서구 역사는 너무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는 생각을 필립 2세의 무덤에서도 다시 하게 된다. 그리스의 전쟁이야기는 주로 도시 국가들의 통일과정에 얽힌 이야기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 또 중세에 와서는 터키의 전신인 오토만 제국의 침공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근대사에서는 발칸반도에서 있었던 1차 세계대전과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던 2차 세계 대전의 이야기가 있다. 무슨 역사가 싸움한 이야기로만 엮여지는 것인가?
하기는,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거리가 되는가? 영화 중에도 전쟁이건 무사나 갱단의 싸움이건 싸움이 주제가 된 것이 인기가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이와 같이 잔인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들고 세계를 향해 외친 평화의 외침은 얼마나 두터운 벽을 넘어야했는가?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온 몸을 바쳐 헌신한 그 일에 오늘 우리들도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숙연해진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미케네 왕조의 한 왕이 묻혔다는 무덤에도 들렸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도 넘는 옛날에 조성된 무덤으로써는 그 규모와 건축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왕의 무덤에 얽힌 전쟁이야기에 싫증이 난다. 이제 그만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의 여행취지에 맞는 여정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도, 인솔자도우리의 이런 간절한 심정을 눈치 챘는가, 아니면 일정이 바쁜 것인가, 서둘러 베뢰아로 뻐스를 돌려 달려간다.
베뢰아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겨우 3주를 그 곳에서 지나고 베레아로 향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그 베레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 내외는 6년 전 캠핑카로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들렸던 곳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바울의 방문을 기념하는 벽화와 동상이 우리를 맞아준다. 베레아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중요한 곳이지만, 그를 기념하는 제단밖에는 그의 방문을 특별히 확인해주는 역사물이 없다. 그의 동상의 얼굴에는 매우 진지하고 슬픈 표정이 나타난다. 이런 모습의 바울은 과연 실제 바울과 얼마나 비슷한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세기말 즈음에 바울의 모습에 대한 대체적인 합의가 형성된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은 성경 중에 바울의 묵시록이라는 문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 문서에 바울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그가 이고니움(Iconium)에 도달했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란다. 그 묘사에 의하면 그의 키는 작았고, 머리는 벗겨졌고, 인상은 근엄했다는 것이다. 아, 또 한 가지, 눈섭이 두 개가 아니라, 한 개였다던가? 이런 묘사가 근거가 되어 지금도 희랍 정교회당에 가면, 바울의 이런 모습이 벽화나 동상, 혹은 후레스코에 나타난다.
데살로니카
데살로니카는 지금은 데살로니키Thessaloniki)로 불리운다. 그리스의 두 번 째 큰 도시로써 200만의 인구를 자랑한다. 데살로니카는 동서양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써, 옛날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II세가 이 지역을 평정한 후 자기의 딸의 이름을 따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동서양의 교역로가 되는 이 지역은 탐내는 자들간에 전쟁이 많았던 곳이고, 따라서 이 지역의 이름난 고대 유적들은 성곽, 망루와 같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다. 로마 시대에는 평화가 지속되어, 그 시대의 유적들은 시장터, 운동시설, 싸우나와 같은 경제적인 번영과 평화를 누렸던 흔적들이다. 도시의 한 가운데를 지나갔던 로마에서부터,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을 잇는 Via Egnatia 대로도 중요한 유적이다. 물론 바울의 시대부터 교회가 세워져 초대 교회의 유적도 많다. 유대인들의 커뮤니티는 일찍부터 존재해서 바울이 이 곳에 왔을 때는 벌써 꽤 큰 규모의 유대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울이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 이미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던 유대교 회당에서 첫 전도를 하게 되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야했다.
유대인의 이야기는 어디 가서 들으나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 이 지역을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6만명의 유대인을 폴란드의 집단 수용소로 끌고 간 후 많은 사람이 수용소에서 죽었고, 그 중 이 곳에 다시 돌아온 사람이 2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유대인 공동체는 성장해서 유대인들의 이 곳에서의 존재는 큰 비중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인의 명절을 도시 전체가 함께 기념한다고 한다는 것이 우리를 안내한 Voula여사의 설명이다. 이스라엘과 그리스의 관계가 밀접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바울이 이 곳에서 3주를 지나는 동안에 전한 복음의 씨가 자라나 이 지역의 중심교회가 데살로니가에 세워지는 이야기가 성경에는 나온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그가 이 교회를 얼마나 중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계속해서기독교회는 이 곳에 존재해 왔고, 4세기에 세워진 교회건물이 아직도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지진이나 화재, 또는 붕괴등으로 기둥 일부와, 건물의 기초와 벽만 남아있지만, 가능한한 그 것들을 다시 사용하여 옛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색갈이 다른 기둥들과, 벽의 자재가 다른 부분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이 곳에 뿌리 내린 기독교회는 이렇게 2천년 가까이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온다.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들이 다 사라진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빌립보
빌립보 유적에 들어서자 마자 우리는 6년 전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캠핑카를 몰고, 지도를 보고 또 보며 이 곳을 찾았던 우리의 모습은 어찌 보면 처량하기도 했었다. 유적을 둘러 보면서도, 안내가 없으니 인터넽에서 찾은 정보를 의지해서, 나름대로 추측해가며, 이 곳에서 바울의 흔적을 찾으려 했었다. 그러나 이제 34명의 동료 순례자들과 유능한 안내인과 함께 이 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날 로마의 대로, Via Egnatia를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는 심정으로 잠시 걸어본다. 안내자는 열심히 옛 도시의 이 모 저모를 설명하느라 목이 쉴 지경이지만, 나는 일행을 잠시 떠나, 옛날 시장터 한 가운데 서서 2천년 전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바울의 소리를 들으려고도 마음을 집중해본다. 이렇게 해보느라면, 그의 열정과 믿음을 조금이라도 전수받을 수 있을까 싶은 심정으로.
역시 안내자와 성서전문가를 모시고 다니니, 그 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중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빌립보에서 전도하던 바울이 귀신 들린 점쟁이 여자노예를 고친 이야기의 배경이다. 안내자가 희랍어 성경을 읽어가며 우리에게 설명한 것은 이렇다.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 일행을 따라 다니며 며칠을 계속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소리를 질렀다고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울 일행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들을 빌립보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소개한 것이 아닌가? 안내자의 말로는 이 귀신의 명칭은 델피 신전에서 사람들에게 신탁을 전하던 예언의 신의 이름과 같은 것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은 희랍세계에서는 제우스를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길이라는 표현도 바울이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그리스도를 통한, '다른 이름으로써는 이룰 수 없는' 구원의 도 (The way of salvation)가 아니라, 여러 가지 구원의 도 중의 하나(a way)를 전한다는 의미로 들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종의 증언은 바울과 그의 복음을 매우 왜곡하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귀신의 방해를 알아채고, 그 여종 속에서 장난하는 귀신을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흠.... 성경의 이 부분을 읽을 때, 왜 바울이 그렇게 역정을 내면서 자기를 좋게 소개하는 여종을 꾸짖었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듯 하다. 희랍인 안내자가 성서의 원어인 희랍어를 인용하며, 설명하니, 역시 실감이 난다.
바울 일행이 무릅써야 했던 난관과 도전은 이아 같은 귀신의 방해만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고침받은 여자 노예의 주인들의 보복으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사도행전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빌립보 고대 유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옛 교회 건물이다. 물론 지금은 벽의 일부와 기둥, 그리고 바닥정도만 남아 있는 유적이지만, 다른 것들은 지하에 묻혔거나, 쓰러졌거나 부서져서 돌무더기가 되었지만, 이 교회 건물은 그런대로 옛날의 영광을 보전하고 있었다. 그 전에 전혀 이 교회의 역사를 모르고 보았을 때에는 그 옛날에 꽤 근사한 건물을 지었네, 감탄하고 지나갔지만, 이 번에 건물에 얽힌 역사를 듣고 보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주후 6세기,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이 건물의 원래 설계는 제단 위에 돔 지붕을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돔 지붕을 가진 건물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성당뿐으로,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계획이었다. 결국 몇 차례 시도 끝에 돔 지붕을 올리긴 했으나 겨우 올린 돔 지붕이 아뿔싸!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 그 후 다시 돔을 세우지 못한 채, 절반도 안되는 면적의 예배실을 만들어 교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어보자는 야심으로 시작한 돔 예배당 건축이 실패로 끝났을 때, 당시의 교인들은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궁금하다. 나 자신 하와이에서 목회하면서, 근사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고 외치며 교인들을 독려하며 설교했었는데, 그래서 근사한 예배당이 지어지긴 했는데, 그 것이 과연 그렇게 가치있는 일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 경험을 가졌다. 신앙의 성숙은 없고,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는 일과 건물 세우는 일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버린 채, 건축에 몰두하는 실수를 많은 교회가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한가지 교회 건물에 얽힌 이야기는 8각형 교회에 관한 것이다. 빌립보 유적 발굴현장 한 구석에 옛 교회의 바닥에 있던 모자이크가 보전되어 있었다. 교회의 터가 8각형이어서 8각형 교회 (Octagonal Chuch)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유적이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니,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이 교회는 공인 후 초기의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면적이 매우 적은 것으로 보아 작은 건물이었을 것인데, 제단도 없고, 다른 방도 없이, 8면으로 이루어진 집회실 하나가 교회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8면으로 되어진 벽을 따라, 모두가 같은 눈 높이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예배했을 것이다. 교회에 직급이 생기고, 장엄한 의식이 생기고 사제들, 특히 주교들은 황제의 의복을 흉내낸 예복을 입는 것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진 것이라는 것이다. 주후 4세기 초에 세워진 이 교회와, 예를 들어 주후 6세기에 세워진 앞에 이야기한 교회는 그 크기와 화려함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은근히 안내자의 설명 속에는, 매우 제도화되고, 화려한 건물과, 사제 중심의 교회 운영으로 특징지워지는 그리스 국교, 정교회에 대한 비판이 배어있다.
설명이 끝난 후, 내가 질문하기를, "당신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으로써,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 정교회(Orthodox) 교인이 이 자리에 서서 안내설명을 했어도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요?" 우리의 친절한 안내자 Voula여사는 무엇인가 숨기고 있던 것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같은 사실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른 설명이 나오게 된다. 아뭏든 우리 안내자는 그리스에서는 인구의 0.6%밖에 안되는 소위 Evangelical Christian으로써, 대부분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에서 온 우리 그룹에는 잘 맞는 안내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 95%를 차지하는 그리스 정교회 교인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엄청나게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보존되어온 예배 의식과 제도, 사제들의 권위와 역할이 철저하게 보호되어 온 교회 운영, 교회 안을 가득 메운 온갖 성상들과 성화... 이런 것들이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빌립보 유적을 떠나서, 전에 방문하지 못해서 참 아쉬웠던 루디아 교회를 찾았다. 옛 빌립보 성 밖, 강물이 흐르는 곳이 모두 세 곳이 있다는 데, 그 중 가장 그럴듯 하게 생각되는 한 곳을 루디아와 그의 일행이 바울 일행을 만났던 곳으로 추정해서 성지로 삼은 곳이다. 참으로 지금도 물살이 제법 빠르게 흐르는, 그러나 사람 무릎 정도의 깊이 밖에 안되는 강가, 사도행전의 묘사와 매우 그럴 사 하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 옛날, 바울이 안식일에 기도하려 갔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흐르는 물 소리가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서 온 성지순례단 한 그룹을 만났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오셨단다. 이 번 여행에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잡소리

그리스 여행 중에 자주 눈에 띄는 것 하나는 거리에 자유롭게 나다니는 개와 고양이들이다. 특히 개들이 많다. 아주 순해서 가까이 다가와도 조금도 겁이 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목줄도 없이 다니는 개들은 신고만하면 동물 관리하는 사람들이 와서 잡아가는데, 이 곳 개들은 지극히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한다. 영양상태도 좋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는 모양이다. 필립 2세 무덤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는데, 내 발치에 순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밥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안 주자니, 너무 야박스러운 것 같고 주자니 버릇될 것 같아서 마음 고생을 좀 했다. 그리스 개 팔자는 정말 상팔자다. 미국에서는 street dog이라고 불리우고, 한국에서는 보신탕 거리가 될 것인데, 그리스에서는 동네 개 (community dog)로써 엄연히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는 그만 자야겠다. 기침이 심해 더 쓸 수가 없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주여 도우소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올림푸스산
카발라 (사도행전의 네압볼리) 풍경
카발라 항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