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2, 2014

에베소



에베소(Ephesus)


에베소는 주후 1세기경, 당시 로마제국 전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디옥, 그리고 다음으로 에베소였다. 인구는 25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지중해서부터 시리아를 연결하는 도로의 서쪽 끝이어서, 아시아에 드나드는 물류의 기지역할을 했다. 도시는 부유해서, 지금도 그 부의 흔적이 유적에서 풍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토록 번성했던 도시도, 항구가 흙에 묻히면서 주후 13세기경 완전히 항구의 역할을 잃게 되었고 그 후로 도시는 급락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터키에는 에게해로 흘러들어가는 큰 강이 4개가 있는데, 강마다  바다쪽으로 흙과 모래가 쓸려내려가 쌓이는 현상 때문에 과거에 바뻤던 항구가 없어지는 희한한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에베소도 과거의 번성했던 항구가 지금은 늪지대가 되어 있고, 도시는 조그마한 마을이 되어 쎌츄크(Selcuk)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다.


에베소는 터키의 고대 유적 중, 가장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 시대에만 해도, 모두 12 곳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신은 아데미(Artemis)신으로써, 에베소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별명을 아데미의 신전지기(Neokoros)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매년 봄철이 되면 아데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각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 났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스스로 뉘우치고 예수를 영접하며, 마술에 관한 서적을 모두 불태우는 일이있었다. 이런 효과적인 복음의 선포가 아데미 우상 장사들의 생계를 위협하게 되면서 그들의 사주를 받아 폭도로 변한 시민들의 소요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런 축제의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에베소는 기독교 초기 역사와 매우 관련이 깊은 도시이다. 사도 바울이 이 곳에서 2년 반 내지는 3년간 머물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운 이야기를 비롯해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아볼로, 디모데, 사도 요한등의 이름이 에베소와 관련이 있다. 크리스챤들에게 에베소방문은 마음이 설레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에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했다. 비교적 일찍 도착했으나, 우리 보다 더 일찍 도착한 관광객들로 인해,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다. 이제까지 본 유적지 어느 곳보다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아데네의 아크로폴리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복잡한 거리에서 바울의 숨결을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발굴팀이 100년 넘게 수고한 덕분에 고대의 건물 모습이 많이 복원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선 눈길을 끄는 곳은 쎌수스(Celsus) 도서관이다. 2세기에 건축된 이 도서관은 이 곳의 총독이었던 아퀼라가 자기의 아버지의 무덤위에 아버지 쎌수스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2세기에 지어져서 바울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은 건물이다.

또 하나 주목할 유적은 극장이었다. 바울을 고소한 은세공업자 데메드리오가 동업자들과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킨 바로 그 곳이다.

 반 원형 오케스트라석과 무대 시설이 있는곳에서 소리를 질러보니, 그 넓은 객석에까지 소리가 들리도록 음향설계가 뛰어난 극장이었다. 고대 음악에서는 주로 어떤 악기가 연주되었는가 물어보니, 오늘과 비슷한,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들이 당시에도 있었다고 안내자는 대답한다. 어디선가 근사한 남성중창이 들려온다. 돌아보니, 흑인 남성 6명이 반원을 만들어 서서 흑인영가를 부르고 있다. 너무 훌륭한 연주였다. 어디서 왔느냐, 무슨 중창단이냐 물으니, 이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온 세미프로 중창단인데, 이곳에 들린 김에 한 곡조 뽑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졸라 한 곡 더 불러달라고 강청을 한끝에 드디어 앙콜송을 들을 수 있었다. 모처럼 재미있는 순간이었다.

극장의 크기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중의하나로써,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극장은 또한 시민회의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어, 바울일행을 고소한 일에 대해 시민들의 격론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극장의 한 가운데서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본다. 아데미를 섬기는 시민들의 노한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이런 함성을 들으면서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졌을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성에도 바울을 도와주는 관리들이 있어서, 그가 극장에 들어가 해명하려는 것을 만류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의 3년 가까운 체류동안에, 믿는 사람도 생기고 친구도 생겼으리라.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3개월을 복음을 전한 후, 반발이 심하자 두란노에 있는 서원에서 두 해 동안을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유적 중에서 두란노를 찾아 볼수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발길을 옮겨 사도요한 기념교회를 찾았다. 사도 요한은, 전설에 의하면, 밧모섬의 유배에서 돌아온 후 20년 간을 이 곳에 머물며 에베소교회를 돌보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위에서 부탁한 유언을 받들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죽을 때까지 섬겼다는것이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으신 후 얼마 안되어, 즉 주후 42년 졍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이 곳에 도착했다고 하는 데, 그러면, 바울보다 먼저 요한이 이 곳에 왔다는 것인가? 이 곳에서는 사도 바울보다도 사도 요한의 존재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바울기념교회는 없어도, 요한기념교회는 있으니까. 사도요한 교회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건물이었다.  6세기에 저스티니안 황제와 그의 부인이 돔이 6개나 있는 큰 교회를 요한의 무덤이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 세운 것이란다. 물론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으나,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후에 터키인들은 무너진 교회 바로 옆에 회교사원을 세웠다. 교회를 돌아보는 중에 미나렡에서는 기도시간을 알리는 챈트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마리아가 살았다고 추정되는 장소가 있어서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곳을 성지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몇년전에는 교황(베네딬트 16세)이 이 곳을 방문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요한교회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데미 신전의 폐허가 보인다. 아데미는 에베소의 수호신으로써, 앞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이 신전은 에베소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이 신전의 규모나 화려함이 얼마나 요란했던지 고대의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였다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 있고 기둥 하나가 달랑 남아 있었다. 그 기둥 꼭대기에 황새 부부가 새끼를 낳고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에베소를 방문하는 모든 크리스챤들이 한 가지 공통적으로 가지는 의문이 있다면, 이렇게 화려하고 위대했던 기독교는 왜 그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일까 하는 것이다. 단지 건물만 폐허가 된 것이 아니다. 교회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4세기 중반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황제들은 자기들의 이름으로 기념교회를 짓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니, 높은 지위의 관리가 되거나, 사회에서 인정받고 출세하는 일을 위해서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던 교회가 어떻게 이 지역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군사적 요인도 있었을 것이고, 회교의 막강한 세력과 그들의 무자비한 종교정책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지만,  기독교회의 이 지역에서의 몰락은 운명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안에서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교회,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소외됨이 없는 교회, 신앙생활이 교양과 덕의 한 모양이 되어 버린 교회는, 이슬람 침공이나, 십자군 전쟁과 같은 모진 바람을 이겨낼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것이 오늘 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에서의 교회의모습이 아닌가? 이런 인간 본성을 이겨 낼 수 있는 저항력이 우리 믿음에 있는가? 이 것을 에베소에서 묻게 된다.  

에베소 방문은 오후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발과 다리가 아프다고 야단을 했지만, 그래도끝까지 따라다니며, 하루의 순례를 마친다. 다음 행선지는 파뭌칼레(Pamukkale)로써, 터키의 유명한 온천 휴양지이다. 이 곳에는 지열로 덥혀진 온천수로써 유명한데, 철분과 칼슘이 탄소와 섞여있어, 피부치료의 효과가 있다고한다. 사진에 보는 묘한 색갈의 기둥이 호텔 정원 한 가운데 서 있었다. 파묵칼레는 목화성 (Cotton Castle) 이라는 뜻을 가진다고 한다.


파뭌칼레로 이동하는 중에 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상한 풍경이 나타난다. 지붕에 병이 하나, 둘 올려져 있는 것이다. 안내가 설명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 집안에 있는 딸 중에 결혼할 나이가 된 처녀가 있으면, 병을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이 병을 보고 결혼하려는 남자가 찾아오면, 처녀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몰래 남자를 훔쳐보다가 남자가 맘에 들면 달콤한 차를, 마음에 안 들면 쓴 차를 내어놓았다는 것이다. 터키 전역에서 보는 풍습은 아니며, 우리가 지나는 이 지방에 국한된 풍습이라고 안내자는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나라의 자존심이 혹시 훼손되는 풍습이 아닐까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몇 년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사막에 사는 베두인의 천막  위에 흰 색갈 깃발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것도 혼기의 딸이 있다는 신호였다. 나도 아직 시집 안간 딸이 있는데, 어떤 수단으로든  신랑후보들을 유인할 수 있는 계책을 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급해진다.

잡소리


그리스와 호텔의 음식은 정말 끝내준다. 특히 터키의 호텔부페는 화려하기가 비할 데 없다. 특히 디저트 섹션은 다양하고, 달콤하기가 그만이다. 맛으로도 화려하지만, 보기로도 화려하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부페도, 며칠 지나니, 그저 그렇다. 처음에는 눈이 놀라고, 다음에는 입이 놀라지만, 며칠이 지나면 별로 놀라는 일이 없다. 다 거기서 거기다. 내가 터키에서 제일 맛 있게 먹은 음식을 치라면, 어느 날 점심에 길가 노천식당에서 먹은 피데라는 음식이다. 중동식 빵에다 고기가 섞인 소스를 넣고 바른 정말 수수한 음식이다. 아내는 터키에서 먹는 음식 중 가장 맛 있는 것이 꿀을 섞은 요구르트라고 한다. 모두 값으로 치면 터키돈으로 10리라 (5불)정도면 사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화려한 것은 역시 생명이 길지  못하다.


3 Comments:

At July 8, 2018 at 7:08 PM , Blogger Unknown said...


안녕하세요?

저는 방송대 중문과 오문의 교수입니다.

번거로운 부탁을 드리려고 메일을 드립니다.
제가 다른 한 분과 함께 방송대 출판부의 지원을 받아 ‘70가지 별난 물건으로 보는 세계문화’라는 책을 집필하여 현재 조판 중입니다. 저의 책에서 귀하의 본 사이트에서 터키 파묵칼레로 가는 도중 '지붕위의 병' 사진자료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사용허락을 해 주신다면 물론 출전을 상세히 밝히고 사용할 것입니다.

이에 귀 사이트 운영자의 동의를 얻고자 메일을 드립니다. 빠른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오문의 배상

010-7292-8872 010-8710-3704 02-3668-4576


 
At July 8, 2018 at 8:47 PM , Blogger Unknown said...

This comment has been removed by the author.

 
At July 8, 2018 at 8:49 PM , Blogger Unknown said...

위의 요청에서 이메일이 누락되었네요.

오문의 교수 이메일
moonoh@kn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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